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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화유산’ 등재…후손, 개성 왕씨 족보와 옥새 기증

왕건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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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문
기사입력 2013-09-13


 

고려시대 수도였던 개성시의 역사유적 중 왕건왕릉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 결정됐다.

왕건왕릉은 북한에서 조선 민족 반만년 역사에서 첫 통일국가로 평가하는 고려태조 왕건의 무덤이다.

능은 만월대에서 서쪽으로 약 3㎞ 떨어진 송악산의 지맥인 만수산 남쪽 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능의 동서북쪽은 만수산의 능선에 막혀있고 남쪽으로는 그리 넓지 않은 평지가 펼쳐져 있다.

『고려고도징』(한재렴, 19세기초)이나 『중경지』에 따르면 왕건의 집터를 잡아준 유명한 풍수가인 도선이 왕건에게 “장차 이곳에 무덤을 쓰고 후대들도 여기에 무덤을 쓰면 대대로 번창할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왕건은 41살에 고려를 창건하고 첫 왕이 된 후 25년간 나라를 통치하다가 66살때인 서기 943년에 이 능에 안치됐다.

현재 이 일대에는 고려왕릉급 무덤의 30%에 해당하는 18기의 능들이 분포돼 있다.

왕건왕릉은 무덤칸이 외칸이며, 판돌로 평천정을 하고 무덤칸의 동서북벽과 천정에는 회를 바른 다음 벽화를 그렸다.

동쪽벽에는 청룡과 매화, 참대를, 서쪽벽에는 백호와 소나무, 매화를 그렸으며 북쪽벽에는 그림이 많이 지워졌으나 현무의 형상이 어렴풋이 남아있다. 그리고 천정에는 별그림을 그렸다.

무덤칸 위는 흙으로 덮고 그 둘레에 12지신상을 새긴 병풍돌을 돌렸다.

그 밖에 난간과 돌범, 상돌과 망주석, 돌등이 있으며, 그 앞에는 2단으로 나뉘어 좌우에 무관과 문관 조각상이 4상씩 마주 서있다.

맨 앞의 제당구역에는 1994년 건립한 ‘고려태조왕건왕릉개건비’와 1867년에 능을 보수하면서 세운 왕건왕릉 표식비와 중수비가 있다.

무덤칸을 돌로 만들고 그 안에 사신을 비롯한 벽화를 그리는 것은 고구려묘제에서 시작됐다.

왕건왕릉은 처음 만들어진 후 여러번 중수됐다. 고려시기 외적이 침략해올 때마다 왕릉들 가운데서 왕건의 시신만은 안전한 곳에 옮겨갔다가 다시 옮겨오곤 했다. 조선왕조 시기에도 7차례 고려왕릉들을 보호하는 조치를 취했다.

특히 18세기 중엽에는 왕건왕릉의 석조물들과 정자각을 크게 중수했으며, 1857년에도 고려왕릉들을 중수하면서 왕건왕릉에는 특별히 중수비와 비각까지 세웠다.

그 과정에 병풍돌과 돌 난간의 방향이 차이가 나게되고 일부 석조물들이 조선왕조 양식을 띠게 됐다.

1994년에 무덤무지를 크게 하고 석조물도 다시 만들어 세우는 개건공사가 진행돼 지금의 모습으로 됐다.

신문은 웅장하게 일떠선 왕건왕릉과 관련한 전설같은 이야기가 있다며, 고려태조 왕건의 후손이 1천여년 동안 대대로 고이 간수해오던 개성 왕씨 족보와 옥새까지 내놓은 일화를 소개했다.

김일성 주석은 1992년 5월 개성의 역사유적들을 돌아보면서 볼품없이 된 왕건왕릉을 보고 못내 가슴아파하면서 왕건왕릉을 태조왕릉답게 개건할데 대한 지침을 주었다.

김주석은 그 후에도 개건 형성안도 보아주며 개건사업을 영도했고 왕릉이 다 개건됐을 때에는 ‘고려태조왕건왕릉개건비’를 세우도록 하고 개건 준공식도 왕건의 생일을 고려하여 1994년 1월 31일에 하도록 했다.

이런 과정을 직접 목격한 왕건의 후손은 민족의 역사를 중시하는 김주석의 숭고한 뜻에 감복하여 대대로 가문의 재보로 고이 간수해 온 개성 왕씨 족보와 옥새를 내놓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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