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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돌아온 국군포로나 유골로 귀환한 국군포로 동등한 대우해야”

[인터뷰] 탈북민단체 ‘국군포로유족회’ 황성삼 前 비대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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림일 객원기자
기사입력 2023-07-05 [10:29]

이 땅에 전쟁의 포성이 멎은 지 70주년이 되는 20237월이다. 해방 후 5년 뒤 김일성의 남침야욕으로 발발한 6·25전쟁은 한반도에 끔찍한 재앙과 이산가족, 국토분단 등을 고착시키고 일시적으로 잠시 총성이 멈춘 휴전상태이다.

그날의 참전용사도 이제는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그나마 북한보다 평균수명이 20년 이상 많은 남한이니 그 정도이다. 전쟁 시기에 북한에 포로병으로 남겨진 국군들도 적지 않았으나 지금은 모두 사망했다고 보는 것이 현실이다. 일생동안 고된 노동에 강요되었고 또한 제대로 못 먹고 온갖 질병을 몸에 달고 살았기 때문이다. 수십 년을 갖은 전염병이 난무하고 기본적 의료시설조차 낙후한 후진국(북한)에서 살다보니 60중반까지 살아도 장수했다고 할 정도이다.

국군포로의 자녀들이 탈북민이 되어 남한 땅에 들어오기 시작한지도 20년이 넘었다. 이들의 생동한 증언은 분단과 통일역사의 한 부분일 것이다. 최근 탈북민들로 구성된 국군포로유족회황성삼 비대위원장을 만났다.

 

 - 국군포로유족회를 소개해 달라.

국군포로 자녀들로 조직된 탈북민단체로 2008년 국방부에서 허가를 받은 비영리 시민단체이다. 주요 목적은 6·25한국전쟁 참전 중 북한(적지)에 억류되었다가 탈출 귀환한 국군포로들의 권익 보호와 명예회복, 그 가족의 정착도움 등이다.

우리 단체에 소속된 국군포로가족은 100여 가족, 250여 명(탈북민)이다. 한국에 들어온 국군포로 유해는 10구 안팎이다. 귀환한 국군포로와 유해는 100% 본인, 가족의 노력으로 남한에 입국했다. 2년 전 비대위원장을 맡아 16개월 일을했다.

- 현재 국군포로 대우는 어느 정도인가.

북한에서 국군포로가 두만강을 건넜고(탈북)으면 브로커비용으로 3천만 원을 지급해준다. 또한 본인이 살아서 한국으로 무사히 입국하면 72천만 원의 보상금을 준다. 주거지원금 15천만 원과 연간의료지원금 1천만 원의 혜택이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국군포로의 자녀가 북한서 부친의 유골을 가져오면 브로커비용 15백만 원 정도만 받는다. 똑같은 국군포로인데 살아온 것과 유골로 온 것이 하늘과 땅 차이다.

- 정부에 아쉬운 점은 뭔가.

대한민국 정부가 전쟁에 참전했다가 북한에서 돌아오지 못한 군인들을 모두 ‘1953년 전사로 규정해 놓았다. 이것부터가 황당하다. 그러니 내 경우를 봐도 아버지가 1953년에 전사했는데 어떻게 67년생 아들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정확히 하려면 국방부가 국군포로들을 ‘1953년 전사(추정)’ 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나 같은 국군포로 자녀들이 한국에 와서 친인척과 DNA검사까지 마치고 99.99% 일치판정을 받았다. 그러고도 이 땅에 예전부터 사는 친가가족의 뿌리인 조부모의 손자, 손녀로 주민등록 서류에 올리지 못하는 우리들이다.

 

유족회는 국군포로 자녀로 조직된 탈북단체

2008년 국방부에서 허가 받아...주요 목적은

6·25한국전쟁 참전 중 북한에 억류되었다가

탈출 귀환한 포로들 권익 보호와 명예회복,

가족의 정착도움...현재 100가족에 600

 

- 또 다른 문제가 있다면.

지난 이명박 정권서 발효된 국군포로법에 따라 현재 국방부가 국군포로를 3등급으로 나눠 관리한다. 1급은 북한수용소 안에서 죽은 사람, 2급은 사회에 나왔지만 북한체제에 순응하지 않은 사람, 3급은 노동당에 적극 동조한 사람이다. 지금껏 생환 국군포로는 100여 명, 이중 2부류에 해당자가 단 1명이다. 그러면 나머지는 3급이란 소리이다. 나의 아버지처럼 북한서 사망한 국군포로도 똑같다는 뜻이다.

- 황당한 심정이겠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전쟁터에 나간 군인을 마치 도살장의 가축마냥 등급을 나눠 관리한다는 것이 이해가 안 간다. 그러면 역적질을 해도 살아만 있으면 훈장도 받고 돈도 받고 애국심 갖고 죽으면 그야말로 개밥에 도토리란 소리 아닌가.

돌아오지 못한 국군포로들은 전투기록이 없어서 아무것도 해주지 못한다면서 결국 안전한 후방에 앉아 기록하나 제대로 하지 않은 자들은 살아남았으니 훈장을 받고 영예로운 전역(제대)을 하였다. 이게 과연 정상이란 말인가.

 

국군포로가 살아 한국으로 무사히 입국하면

72천만의 보상금과 주거지원금 15천만

연간의료지원금 1천만 원의 혜택이 주어져

 

자녀들이 한국에 와서 친인척과 DNA검사까지

마치고 99.99% 일치판정을 받았어도 가족의

뿌리인 조부모의 손자, 손녀로 올리지 못해



 - 고향이 어디인가.

1967년 함북 온성군서 태어났고 2살 때부터 은덕군(일명 아오지)서 살았다. 형제는 4남매 중 둘째로 외아들이었다. 아버지는 국군포로 출신 탄부, 어머니는 부양(주부). 1983년 고등중학교를 졸업 후 인민군 입대를 원했으나 부결되었다. 동창들 속에 나처럼 국군포로 아들들이 몇이 있었는데 단 한 명도 입대하지 못했다.

자세히 설명하면 1980년대 후반부터 국군포로의 자식은 인민군 공병(건설)부대에 입대시켰다. 군복 차림에 10년간 삽과 곡괭이만 들 건설장서 일하다가 성한 몸으로 제대하면 다행이다. 내가 학교졸업 후 배치를 받은 곳은 17일 공장(군수품 생산)이었다. 당시 함경북도 고교졸업생 60~70% 정도가 17일 공장에 무리(집단)배치 받았다. 17일 공장은 김일성의 교시에 의해 1970년대 말에 생겨난 1급 군수품공장이다.

- 어떤 군수품을 생산하는가.

기관총, 대포, 어뢰, 미사일 등에 들어가는 화약을 제조한다. 군수품공장은 한 번 입직하면 종신토록 근무해야 한다. 참고로 북한의 모든 1급 공장·기업소에는 군수직장이 있으며 군수용품(군대서 사용되는 모든 생필품)을 생산한다.

독학으로 기술기능 5급을 취득했다. 노동당에 입당하려고 충성의 100일 전투에서 열성껏 일을 했으나 입당은 되지 않았다. 대신 사로청중앙위원회 표창을 받았다. 너무 화가 나서 며칠간 직장출근을 안했더니 안전원(경찰)이 찾아왔다.

- 어떤 처벌을 받았나.

왜 직장에 안 나오는가?” 하는 안전원의 질문에 나는 인민군대에 나가겠다!”고 답했다. 정말이지 군대에 나가서 꼭 입당을 하고 싶었다. 원래는 무단결근하면 최소 며칠 정도는 안전부 구류장에 갇힐 수도 있는데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인민군대에 나가서 당에 충성하겠다고 하는 사람을 어떻게 처벌하겠는가(웃음).

 

1967년 함북 온성군서 태어나 아오지에서 살아

독학으로 기술기능 5급취득...노동당 입당위해

충성의 100일 전투에서 열성껏 일을 했으나

입당은 못되고 사로청중앙위원회 표창은 받아

 

 - 아버지는 어떤 분이었는가.

나의 아버지(황규원 1925년 생)는 충청남도 보령군 청나면 장현리서 태어났다. 전쟁이 한창이던 1952, 국군에 입대(군번: 8834251) 했다. 전투 중 적군(인민군과 중공군)에 잡혀 포로가 되어 아오지포로수용소에 수감되었다. 아버지의 말에 따르면 전쟁터에서는 아군의 포격에 맞아 죽는 군인도 다반사다고 했다. 총이 부족하여 맨 몸으로 전선에 나가 앞 전사가 죽으면 그 총을 인계 받고 싸우기도 했다고 한다.

- 또 어떤 증언이 있었는가.

북한정권은 전쟁이 끝나고 국군포로들에게서 전향서를 받고 사회(건설장, 농촌 등 험한 일자리)로 내보냈다고 한다. 나의 아버지는 고향으로 꼭 가야겠다며 전향을 거부해 결국 2~3년 늦게 사회로 나와 탄광에 강제 배치를 받았다.

북한당국은 국군포로들을 보통 도시에서 추방되었거나 성분이 나쁜 여성들과 강제결혼을 시켜주었다. 결국 가정이라는 것이 생겼고 자연스럽게 사회에 정착하게 되었고 또 한 편으로는 가족이라는 감시인원속에 갇히게 되었다.

- 아버지 동료들과의 우정은 있었나.

명절 때면 아버지 친구(국군포로)들끼리 술자리도 있었는데 일체 정치적인 소리는 하지 않았다. 그리고 서로가 서로를 깊이 알려고 하지 말자고 약속했다. 그것이 말(발언) 실수를 예방하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했다. 술자리에서 말을 잘못하면 가족이라도 안전부에 보고하는 경향이 있다. 정말 잔등도 남이라는 말이 딱 맞다.

 

아버지(황규원 1925)는 충남 보령군서 출생

전쟁이 한창이던 1952, 국군에 입대(군번 8834251)

전투 중 포로가 되어 아오지포로수용소에 수감

 

부친은 전향을 거부 2~3년 늦게 사회로 나와

탄광에 배치, ‘강제결혼을 시켜가정이 생겨

 

 - 아버지의 애향심은 어느 정도였는가.

정말이지 말로 다 표현을 못할 정도이다. 아버지는 연로보장(정년퇴직)을 받고 집에서 쉬었는데 작고하기 1~2년 전에는 항상 철도역에 나가서 있었다. 기차를 보며 고향으로 가고 싶다!”며 하염없는 눈물을 흘리고 또 흘리시었다.

당시는 우리 자식들이 아버지가 정신이 잘못된 것 아닌가?’ 하고 생각했는데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잘못된 것은 야만적인 노동당독재 정권이고 죽어도 고향으로 가고 싶어 했던 아버지는 너무나 정상적이고 훌륭한 분이었다.

- 또 다른 모습을 기억하나.

19897월 평양에서 열린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 때 남조선(한국)에서 림수경 대학생이 왔다. 북한당국은 림수경을 사회주의 체제선전에 다소 이용하였다. 아버지는 그때 광경을 보면서 통일되기는 콧집이 틀렸다!”며 크게 실망을 하셨다. 많은 국군포로들이 이때부터 거의 자포자기 상태로 한숨을 쉬면서 근근이 연명하며 살았다. 나의 아버지는 영양실조에 의한 정신분열증으로 1992년에 사망하였다. - 언제 한국으로 왔는가.

군수품공장은 사회의 일반 공장보다 식량사정이 낫다고 하지만 그래도 배고프기는 고난의 행군 때나 마찬가지였다. 언제인가 대한민국 쌀을 받은 적 있었다. 군수품공장에 우선 공급하라는 김정일의 방침에 따른 것이다.

20032월 이미 전에 탈북하여 중국서 사는 누나를 찾아 두만강을 건넜다. 40일 만에 중국공안에 체포되어 북송, 청진집결소에 3개월 수감되었다. 이듬해 어머니와 막내여동생을 데리고 다시 탈북하였다. 중국에서 자리를 잡고 아내와 딸을 탈북시켰다. 태국을 거쳐 20063월 대한민국으로 오게 되었다.

 

2003년 탈북, 중국서 누나 찾아 두만강 건너

중국공안에 체포 북송, 청진에서 3개월 수감

이듬해 어머니와 막내여동생을 데리고 탈북

아내와 딸과 함께 2006년 한국에 에 입국

 

국군포로인 아버지들에게는 지옥의 땅

북한서 피눈물의 역사가 시작된 날이고

이제 북한에 남겨진 국군포로가 없다

 

 - 그동안 어떤 일을 하였는가.

하나원(탈북민정착교육기관)을 나와서 처음 배치 받은 지역은 부산이다. OO조선소에 입직해 용접공으로 8년간 일을 하였다. 도시에서의 생활이 다소 불편하여 2014년부터 경상북도 상주시로 이사를 하여 현재는 농사일을 하고 있다. 크게 돈 버는 일은 아니지만 자연 속에서 자유롭게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한다는 것이 장점이다.

- 용산 대통령실 앞에서 시위를 하던데.

국군포로법 개정안 폐지를 요구한다. 이 법은 수만 명의 미귀환 국군포로를 3~4번 죽이는, 국가를 위해서라면 있어서도, 있을 수도 없는 악법이다. 미귀환 국군포로들과 그 가족들에 대한 특별법을 대통령령으로 제정하라는 것이다.

살아 돌아온 국군포로나 유골(혹은 자녀증언, DNA일치판정 등)로 귀환한 국군포로나 모두 동등하게 대우를 하라는 것이다. 그게 윤리·도덕적으로 정상이다. 돌아오지 못한 국군포로는 국가가 나서서 반드시 유골이라도 찾아와야 한다.

- 끝으로 하고 싶은 말은.

해마다 727일이면 남한서는 휴전협정일로 전쟁의 포화가 멈추고 일시적이지만 평화가 찾아온 날이라고 한다. 그러나 국군포로인 우리 아버지들에게는 지옥의 땅 북한서 피눈물의 역사가 시작된 날이다. 이제는 북한에 남겨진 국군포로가 더는 없다. 그들은 죽지 않았으며 사라졌을 뿐이다. 오늘의 우리 조국 대한민국을 지키려 피 끓는 청춘을 서슴없이 바친 국군 장병들은 우리가 영원히 기억해야 할 영웅들이다.

 

림일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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