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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민들 신앙생활은 부침 심해…교회 참을성 있게 기다려야”

[인터뷰] 기독교대한감리회 상암교회 김석순 원로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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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문
기사입력 2019-12-12 [10:51]

한국전쟁 휴전 이후 시작된 탈북민 역사다. 1960~70년대는 주로 휴전선을 넘어 귀순해오는 인민군 군인들이 대부분이었다. 1980년대부터 다양한 계층의 북한주민들이 남한으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1980년대 말까지 입국한 연평균 10명 안팎의 탈북민들은 무척이나 행운이었다. 당시는 주택과 직업은 물론 넉넉한 정착금을 지급해주었다. 1990년대 중반부터 50~60, 많을 때는 100명 가까이 되는 탈북민들이 남한 땅을 밟았다.1990년대 들어 동구권 사회주의 붕괴 후 유학생, 벌목공, 건설노동자 등 해외에서 일하는 북한주민들이 남한으로 왔다.

이때부터 정부의 탈북민 지원정책에서 다소 변화가 생겼다. 그전에 안보기관의 주선으로 직업알선 위주가 노동행정 당국의 직업교육으로 바뀌었다. 또한 기관에서 맡아하던 생활지원을 종교 및 사회단체와 협력하여 진행하는 풍토가 생겼다. 탈북민은 정부의 정착교육을 받고 사회에 나올 때 교회로 안내 받는다.

탈북민들은 대략 70%가 교회를 소개 받으면서 사회생활의 첫 시작을 한다. 1~2년 뒤 그 비율은 절반으로 하락된다. 탈북민들의 교회 및 신앙생활을 취재하기 위해 상암감리교회 김석순 원로목사를 만났다.

 

상암감리교회를 소개해 달라.

감리교신학대학을 졸업하고 1977717상암감리교회를 개척 설립했다. 당시 302층 건물을 전세로 얻고 거기서 가족친인척 10여명으로 교회를 시작했다. 지금은 30대 후반의 목사를 담임목사로 세우고 장로 4, 권사 등 임원 30여명, 200여명의 교인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위해 충성하고 있다.

우리 교회는 동네 주민들의 다양한 편의를 위해서 적극 개방하는 편이다. 지하 1(교육관), 지상 1(어린이집과 식당), 2(예배당), 3(교육관과 사회관) 모두 280평의 공간에서 여러 가지 사역 및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교회 말고 다른 경력도 있던데.

유치원(1977~92), 새마을유아원(1983~90), 어린이집(1991~현재) 등을 설립하여 운영해오고 있다. 교회연합 사업으로 동리, 구청, 시청, 경찰서 등의 공무원들과 한국교회들이 연합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일들을 위해 교동, 교구, 교시, 교경 등의 연합기관에서 큰일을 맡아 지금 은퇴한 이후에도 참여하고 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봉사활동으로 하는 것이니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서울YMCA 부이사장이다.

부족한 지혜와 능력을 구한말 이후 116년 역사를 가지고 나라와 민족의 발전을 위해 위대한 지도자들(이상재, 이승만 등)을 양성 배출하며 함께 수고하고 충성했던 훌륭한 선배들의 업적과 사랑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봉사한다. 온 국민이 좋아하는 자랑스러운 기관으로 더욱 성장기여 보필할 수 있는 앞날을 위해 부족한 지혜와 능력이지만 하나님의 영광에 이바지할 수 있게 도와주십사 기도하고 있다.

과거 탈북민 장례를 치러준 적 있던데.

탈북민 최성국(가명 55, 20115월 사망) 씨의 장례를 집례한 일이 있다. 함경북도 온성군 아오지 태생인 그는 고향에서 이미 폐결핵 중증환자로서 남조선(대한민국)에 가면 고칠까 해서 아내와 함께 탈북 하였다.

2010년 가을 즈음, 서울에 왔다고 들었다. 관계기관을 거쳐 주민등록증을 받고 서울에 살게 되었고 정부정책에 따라 우리 교회주변의 배정된 임대아파트에 거주했다. 교회에 출석할 때는 이미 폐암이 중증이었을 때였다.

목사님 마음이 안타까웠겠다.

서울의 국립병원에서 사망했는데 당시 구청 사회복지과에서 지원하는 복지정책에 따라 지정병원으로 옮겨 장례 절차를 마쳤다. 우리 교회에 출석한지 한 달도 안 돼 사망한 최성국 씨의 장례식 비용은 대략 200만 원 정도였다.

다행히 구청에서 탈북민지원정책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교회 교우들 20여명이 구청직원들과 함께 3일장을 치렀다. 고양시 벽제 장묘원의 화장(火葬)을 거쳐 유골은 근처 6Km 떨어진 시립납골묘원에 안치할 수 있었다.

 

탈북민 최성국 씨 장례 집례한 일 있어

함북 온성군 아오지 태생으로 고향에서

이미 폐결핵 중증환자로서 남조선 가면

고칠까 해서 아내와 함께 탈북2010

교회주변의 배정된 임대아파트에 거주

교회 출석할 때는 중증환자로 회생 불가

 

고인의 미망인은 지금 교회에 나오는가.

그것이 좀 껄껄하다. 불쌍하고 딱해서 부족하지만 진실로 도왔는데 또 주위의 많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장례를 마쳤는데 서너 번 교회에 출석하더니 그 뒤부터는 얼굴을 안 보이는 것이다. 최 씨 부부가 서울에 와서 임대아파트를 받고 살 때 교회에서 가구와 세간도구도 새것으로 사다 준, 자기도 넉넉하지 못하면서도 남을 돕는 게 귀한 일인 줄 믿고 수고한 교인들이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다.

교회에 현재 탈북민이 있는가.

2014년 가을 경 50대 후반의 이철남(가명) 씨가 우리 교회에 나왔다. 고향은 평안남도인데 중국에서 수년 간 고생하다 남한에 왔다. 처음에는 주일마다 나오다가 어떤 때는 몇 주씩 연속 결석하기도 하였다. 신앙심이 없었다.

다행히 운전자격증이 있어 교회와 어린이집의 승합차운전을 시켰다. 한 달에 100여만 원 임금을 줄 수 있을 때였다. 학부모들에게 말과 태도가 거칠고 운전습관이 불안하다는 민원이 있어 한 달을 겨우 채우고 그만두게 했다.

지금도 교회에 나오는가.

구청의 일자리창출 기관과 협력하여 박봉이지만 몇 군데 취직되어 일하는 듯 했지만 자꾸 퇴출되었다. 언젠가는 네트워킹 판매망에 가입하여 이 사람 저 사람에게 금방 부자 되고 넉넉해질 듯 분주하더니 그것도 그만 두었더라.

언젠가는 수입이 없어 임대아파트보증금 인상분을 낼 길이 없으니 150만원만 도와주면 3개월에 나눠 틀림없이 갚겠노라고 해서 차용증도 없이 남에게 빌려서 줬더니 지금은 어디로 갔는지? 죽었는지? 살았는지 연락두절이다.

또 다른 탈북민이 있다면.

새옹지마(塞翁之馬)라더니 기독교식 표현은 아니다. 한국에 온지 7년째이고 나이 80세가 훨씬 넘으신 황해도 태생의 할머니 한 분이 있다. 정말 아름다운 모습의 신앙생활을 하며 출석하고 있다. 세 딸을 두신 분인데 맏이는 북한에, 둘째는 중국에, 막내는 남한에 각각 살고 있다. 현재 가까운 임대아파트에서 외손자(맏딸의 아들)와 함께 살고 있다. 주일예배는 물론이고 새벽기도회도 매일 꼬박꼬박 나온다.

 

한국에 온지 7년째로 나이 80세가 넘으신

황해도 출신의 할머니 한 분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있어임대아파트에서 살며

주일예배, 새벽기도회도 꼬박꼬박 나와

 

교회에서 탈북민에 대한 관심은.

나름 탈북민들에 대한 관심과 진솔한 사랑을 주고 있다. 우선 외로운 탈북민들에게 이전부터 잘 지내던 남한의 일가친척처럼 대하도록 하며 가능한 더욱 배려하고 너그러움으로 베풀 수 있기를 교인들에게 간곡히 당부한다.

탈북민들도 북한에서 살았던 자신의 마음을 열고 남한사람들과 소통하는 일이 대단히 중요하다. 남한에 살려고 왔기에 과거의 자존심이나 사경의 고비를 넘겼던 일들을 무슨 굉장한 공적처럼 내세워서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탈북민들의 신앙생활을 어떻게 보는가.

여러 탈북민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북한에서 김일성 우상화생활이 신통히도 남한의 종교생활과 유사하다고 한다. 모든 주민들이 매주 생활총화에서 수령사상으로 학습하고 남을 비판하는 것, 강연과 노래모임 등이 그렇다고 한다.

하여 남한에 와서 신앙생활 할 때 다소 혼돈스러워 한다. 몇 해가 지나서야 깨우치고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는 탈북민도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는 경우도 있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본인의 바른 마음가짐이다.

탈북민들에게 교회는 무엇인가.

자유를 찾아 온 탈북민들이 수십 년 동안 북한당국의 강제적인 교육으로 어려서부터 머리에 굳어진 김일성 교육사상을 완전히 하나님의 사상으로 바꾸는 곳이다. 모든 사람들에게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목사로부터 전달받고 생명의 말씀인 성경을 공부하고 사랑과 용서를 베푸는 곳이다.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려고 십자가에 피 흘려 돌아가신 예수님의 거룩한 사랑을 탈북민들을 꼭 알아야 한다.

분단의 남과 북을 어떻게 보는가.

해방 이후 70여년의 긴 세월을 남과 북의 정치지도자들은 뼈아픈 비극의 분단현장을 정치에 악용하여 왔다. 북한은 지금까지 김일성 일가의 독재국가이니 더 말할 것도 없지만 자유민주국가인 남한에서도 한심한 경우가 많았다.

민족의 지도자들이 진정으로 겨레를 사랑한다면 이념 때문에 전쟁을 해서도 안 되고 보복과 살상을 해서도 옳지 않다. 세상이 알겠지만 정치인들은 선거 때마다 일명 민생과 안보와 통일의 중개인 노릇을 그만 두었으면 한다.

 

자유를 찾아 온 탈북민들이 수십 년 동안

강제적인 사상교육으로 어려서부터 굳어진

김일성사상을 하나님의 사상으로 바꾸는 곳

교회는 하나님 말씀을 목사로부터 전달받고

성경을 공부하면서 사랑과 용서 베풀어야

 

남한의 대북정책에 대해 견해는.

인도주의적인 대북 지원활동은 정치적 이해에 상관없이 부단히 진척되길 바란다. 설령 정권이 바뀔지라도 민간단체나 종교단체들, 특히 기독교단체들에 의해 교부되는 사랑의 지원활동 등은 지속되어야 한다. 그것들이 어리석은 전쟁의 도구가 될 수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진화의 소방기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과거 동족상잔의 비극은 있었어도 남북 우리 민족은 하나님께서 똑같이 사랑하신다.

탈북민들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거두절미하고 이 땅에 온 탈북민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주신 귀중한 보배이다. 남과 북을 다 체험한 소중한 인재들이다. 그들을 잘 준비시켜 미래세대 지도자로 성장촉진 시킬 필요가 절실하다. 국민의 어엿한 대표로 국회의원이나 시, 도의원 등 남북 간의 이해를 돕고 촉진하는 자리에서 공사의 회사나 기관에서 유능하고 긴요한 일꾼으로 일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양성되어야 한다.

자신을 소개해 달라.

19467월 충청남도 논산의 농촌 가정에서 태어났다. 형제는 5남매 중 내가 맏이다. 동생들을 돌보느라 고생도 했다. 1963년 서울로 이사 왔는데 그때부터 온 가정이 교회로 출석하게 되었다. 19662월 서울용문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모 대학 법과대학에 지원하여 장학생이 되길 원했지만 실패하고 이듬해 나를 아껴주시던 선생님의 권유로 연세대학교 신과대학에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입학하였다.

좀 더 자세히 말해준다면.

대학 재학 중 군대에도 갔다 오고(군대생활은 당시 김신조 사건으로 만 36개월을 1주일 넘겨서야 겨우 제대할 정도였다) 그 사이 신학적인 갈등과 개인 사정으로 4년여 이방생활로 지체하다가 19772월 감리교신학대학, 19912월 중앙대학교 교육대학원을 졸업했다. 40대 중반에 교육대학원에서 유아교육을 전공했는데 별종이었지만 보람 있으며 목회에 보탬이 되는 공부였다.

김 목사님의 통일관은 무엇인가.

성급한 통일보다는 완전한 평화가 우선이라고 본다. 분단의 오랜 역사 속에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온갖 영역에서 서로 다른 면들을 인정하고 그 차이를 조금씩 좁혀나가야 한다. 우선 동족상잔의 비극과 아픔은 용서해야 한다.

남한은 북한을, 북한은 남한을 잠시 나뉘어있는 내 민족 국가로 알면 된다. 우리 민족이 해외에 나가 살면 교포로 동족애를 느끼며 사랑하듯이 그 이상의 애착과 사랑으로 인정해야 한다. UN에 남과 북이 따로따로 가입되어 지금의 남쪽 대한민국과 북쪽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현실적으로 인정해야 한다.

끝으로 하고 싶은 말씀은.

절대평화, 점진발전, 장래통일의 확실한 공존주의와 사랑과 신뢰가 중요하다고 본다. 국토통일이 안 되어 분단의 상태라도 문제될 것이 전혀 없다. 사람 사이, 동족 사이에 평화가 있는데 지도자가 둘이면 어떻고, 하나면 어떠한가.

형제가 서로 우애하면 혼자 있는 것보다 훨씬 낫다. 다만 어리석은 전쟁은 절대 없어야 한다. 전쟁을 해서라도 통일을 원한다면 그걸 지지할 사람은 분명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전쟁은 인간의 죄악이요, 하나님의 저주이다.  

림일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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