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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실체를 밝힌다] 마약공화국 물려받은 김정은

외화 손쉽게 끌어들일 수 있는 마약의 유혹을 김정일은 쉽게 벗어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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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문
기사입력 2016-11-03 [11:13]


<김형수 객원기자>
북한에 범람하고 있는 마약은 애초에 아편재배로 부터 시작됐다. 198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북한의 경제난은 심각해졌다.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이 잇달아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받아들이면서 기존의 와르샤와(바르샤바)조약기구에 따른 사회주의 시장경제가 붕괴되기 시작한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세계청년학생축전’ 계기로 경제몰락
 
1955년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로 구성된 와르샤와 조약기구는 군사동맹의 틀을 벗어나 자본주의 시장에 대항하기 위한 경제교류를 활발하게 벌렸다. 북한은 와르샤와 조약에 가입하지 않았지만 무역 분야만큼은 의존도가 상당히 높았다.
당시까지 김일성은 사회주의 동방초소를 지켜선 파수꾼으로 북한을 내세우면서 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로부터 해마다 많은 원조를 무상으로 받았다. 원유와 비료, 밀가루에 이르기까지 동유럽 사회주의에 의존해왔다. 이러한 와르샤와 조약기구는 1980년대 후반에 들어서며 동유럽사회주의 붕괴와 함께 와해되기 시작했고 1991년 동서독의 통일로 막을 내렸다. 와르샤와 조약기구의 해체에 대비하지 못했던 북한의 경제는 큰 혼란을 겪어야 했다.
1980년대 말에 이르러서는 김일성의 이름으로 학생들에게 무상으로 공급하던 교복마저도 보장하기 어려웠다. 이런 와중에 한국과의 체제경쟁에 집착한 김정일의 무리한 외화낭비는 북한의 경제를 더욱 파멸로 몰아갔다.
1988년에 한국의 서울에서 올림픽이 열리자 김정일은 1989년 평양에서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을 성대히 개최하도록 지시했다. 북한의 경제가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을 계기로 몰락했다는 인민들의 주장은 단순한 추정이 아니었다.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까지 치르며 나라의 금고가 바닥이 나자 김일성은 ‘자력갱생’이라는 구호를 전면에 내세우고 인민들의 고혈을 짜냈다. 소련의 원유공급이 끊기면서 처음으로 등장한 것이 북한 인민들도 잘 알고 있는 ‘목탄차’였다. 김일성은 당장 원유를 해결할 방법이 없게 되자 휘발유를 쓰는 자동차들을 모두 개조해 목탄가스로 움직이도록 지시했다. 한편으로는 외화벌이 기관들을 급속히 확대하며 돈이 될 만한 짓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덤볐다.
 
양강도의 많은 땅 아편 밭으로 개조
 
오늘날 북한의 인민들을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병들게 만든 마약도 1980년대 말 김일성의 지시로 시작됐다. 1990년 1월 8일 김일성은 금수산의사당 경리부 당위원회에 아편을 재배할 데 대해 비밀리에 지시를 내렸다.
금수산의사당 경리부에서는 아편을 재배할 데 대한 김일성의 1월 8일 지시를 비밀로 붙이기 위해 ‘108 교시’라는 별칭을 붙여놓았다. 또 금수산의사당 경리부는 ‘108 교시’ 관철이라며 양강도의 많은 땅을 아편 밭으로 개조했다. 양강도 백암군의 ‘10월 18일 국영종합농장’의 1만 정보에 달하는 땅과 대홍단국영종합농장이 통째로 금수산의사당 경리부 산하로 넘어갔다. 아편재배의 비밀을 감추기 위해 ‘8호안전부’를 동원해 주변을 엄격히 감시하도록 했다.
김일성은 비밀을 감추기 위해 아편을 ‘백도라지’라고 이름 지어주고 아편농장을 ‘백도라지 농장’으로 부르도록 지시했다. 금수산의사당 경리부는 산하의 모든 기관들에서 인원들을 뽑아 교대제로 아편재배에 동원되도록 조치했다.
금수산의사당 경리부 소속의 기관기업소들과 함께 만청산연구원의 연구사들도 3달이라는 기간으로 아편농사에 교대로 투입됐다. 아편재배에 동원된 인원들은 30명을 한 개 소대로 군대와 꼭 같은 대열체계를 갖추었다.
아편채집을 위해 한 개 조를 두 사람씩으로 조직했다. 한사람이 앞에서 면도칼로 아편 꽃 열매에 금을 그으면 뒤에서 일정 간격을 두고 따라오던 다른 사람이 아편 꽃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진을 채집해 유리잔 속에 채워 넣었다. 이렇게 금수산의사당 경리부에서 시작된 아편농사로 김일성과 김정일은 짭짤한 수익을 올렸던 것 같다. 김일성은 1990년대 중반에 이르러 북한의 수많은 협동농장들에서도 노골적으로 아편을 재배하도록 장려했다.
 
수많은 주민들 아편중독자로 만들어
 
김일성이 지시한 아편재배는 수많은 주민들을 아편중독자로 만들었다. 1990년대 동유럽사회주의가 붕괴되면서 원료와 자재부족으로 북한의 제약공장들도 대부분 가동을 멈추었고 병원들은 환자들에게 필요한 약을 공급하지 못했다. 특별한 처방도 없고 의약품 공급까지 끊기자 북한의 주민들은 아편을 ‘만병통치약’이라고 부르며 어린 아이들의 감기와 설사에도 아편을 투여했다. ‘고난의 행군’이 시작될 무렵인 1990년대 중반에는 북한 전역에 마약중독자들이 넘쳐났다.
그러던 1994년 7월 8일 김일성의 급사로 권력을 물려받은 김정일은 통제 불능으로 치닫는 북한의 아편문제를 폭력으로 다루기 시작했다. 북한의 아편을 재배하는 농촌들에서 시범겸(본보기)으로 아편중독자들을 집단적으로 처형하기 시작했다. 알려지게 되면서 국제사회는 북한을 범죄국가로 낙인찍었다. 국제사회의 비난이 거세지자 김정일은 아편재배의 면적을 줄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외화를 손쉽게 끌어들일 수 있는 마약의 유혹을 김정일은 쉽게 벗어나지 못했다. 아편재배 면적을 줄이는 대신 북한은 화학성 마약인 필로폰 생산에 머리를 굴렸다. 권력유지를 위해선 가짜담배, 위조지폐 범죄도 가리지 않았다.
결국 북한에서 마약은 일반주민들을 넘어 국가의 주요 간부들까지 가리지 않고 중독되어갔다. 북한의 간부들이 아편에 손을 대기 시작한 유래를 따지면 김일성과 항일 투쟁을 함께 했다는 빨치산 출신들의 회상기가 큰 몫을 했다.
‘항일빨치산참가자들의 회상기’라는 북한의 도서들을 보면 일제와 싸우다가 부상을 당해 약이 없을 때 아편으로 치료했다는 대목들이 많았다. 김일성의 주요 빨치산 활동무대였던 중국 동북 3성은 일제강점기 아편생산지로 이름이 높았다.
김일성이 비밀리에 지시한 아편재배, 소위 ‘108 교시’는 오늘날 북한의 수많은 인민들을 마약에 찌든 정신적, 육체적 불구자로 만들어 놓았다. 그런 마약공화국을 물려받은 김정은의 앞날도 절대로 순탄치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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